[이만열 역사 칼럼] 4.19 혁명을 다시 생각한다

이만열(숙명여대 명예교수, 전 국사편찬위원장)

오늘은 4.19혁명 64주년이 되는 날이다. 해마다 이날에는 수유리에 있는 4.19혁명묘역을 다녀오곤 한다. 오늘은 대학동기이기도 한 외우 김경희 형과 함께 수유리 묘역을 찾았다. 64년전 이날 김 형은 여러 친구들과 같이 위험을 무릅쓰고 청와대 앞까지 진출, ‘4월혁명’에 앞장섰던 투사다. 그런데 나는 바로 그날 새벽 청량리역에서 춘천행 기차를 타고 귀대 길에 올랐던 일등병이었다. 그 해 ‘3.15 대선’을 부대에서 치른 후 첫 휴가를 나왔다가 귀대하는 길이었다.

4.19를 회상하면 그때 혁명대열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것이 늘 마음에 빚처럼 남아 있다. 대학 3학년으로 진학하려던 1959년 3월, 군대 소집 영장을 받았다. 전후반기 훈련을 거쳐 6사단 공병대대로 배치되었다. 1960년 3.15대통령 선거 후 휴가를 얻었고, 군에 귀대하는 날이 4월 19일이었다. 귀대하기 전날 서울에 머물렀다.

3.15부정선거에 대한 항거는 마산에서 시작되었다. 이때 경찰은 시위하는 군중을 향해 총을 쐈고, 공산당 조직이 배후에 있다는 식으로 몰아갔다. 최루탄에 맞아 죽은 김주열의 시체가 4월 11일 바다에서 떠오르게 되자, 마산의 어머니들이 다시 들고일어났다.

부정선거에 대한 시위가 북상, 확대되면서 4월 18일에는 고대생 시위대가 종로 4가에서 깡패들의 공격을 받았다. 이 소식은 서울시민을 흥분시켰고, 혁명의 분위기를 한껏 무르익게 했다. 그런 분위기를 느끼며 나는 4월 19일 새벽 춘천행 열차를 타고 귀대했다. 그날 시위대는 중앙청을 거쳐 경무대(청와대) 앞까지 진출했고, 흥분한 시민들은 탑골공원에 있던 이승만 동상까지 끌어내렸다.

이날 오후 1시40분경 경찰들이 군중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걷잡을 수 없는 상황에서 계엄령이 선포되었으나 4월 25일 교수들이 ‘학생의 피에 보답하자’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에 나섰다. 4월 26일 이승만은 젊은이들의 불의에 항거하는 모습을 나름대로 평가하면서 하야, 그 뒤 하와이 망명길에 나섰다. ‘4.19 혁명’이었다.

4.19혁명은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가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지만, 그 원인(遠因)은 해방 이후 축적된 정치․경제적 부패와 민족적 모순에 있었다. 해방 독립된 나라에서 가장 먼저 척결해야 할 과제가 친일 식민세력의 청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948년 집권한 이승만은 정치․사회적 혼란을 핑계로 부일배들을 옹호, 등용했다. 반공의 명분 뒤에 숨었던 친일 세력은 독립운동 세력의 등장을 막고 중도적인 통일 세력을 제거하여 사회 경제적 헤게모니를 잡아갔다.

6.25전쟁 이후 친일 세력은 극우적인 이념대결을 확대시키면서 정치․사회․경제적 모순을 심화시켜 갔다. 4.19혁명은 해방 이후의 이 같은 역사 퇴행에 철퇴를 가한 것이었다. 4.19혁명은 동학혁명의 정신을 잇고 3.1정신을 계승하여 이룩한 민중의 밑으로부터의 혁명이었다.

이렇게 이룩한 4.19혁명은 한국 역사상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4.19혁명은 ‘백성의 나라’(민국)로 시작된 대한민국에서 민주주의를 기사회생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몇 번에 걸친 선거에서 투표권이 빼앗기는 경우도 있었고, 각종 부정한 방법은 선거 자체를 요식화했으며, 민주주의 자체를 형해화시켰다. ‘4.19혁명’은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를 회복시켰다. 이렇게 되찾은 민주주의가 자유와 창의성을 발휘하는 토대를 만들었고, 더 나아가 한국 사회의 각종 민주적 기틀을 재조성해 갔다.

세계 제2차 대전 후 민주화와 산업화에 성공한 나라는 몇 되지 않는다. 그 대표적인 나라로 대한민국이 꼽힌다. 민주화와 산업화가 동시에 이뤄지기 시작했다. 굳이 그 우선순위를 말해야 한다면 민주화의 역량 위에서 산업화의 성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한 사회의 민주화는 사회 전체의 인적 역량을 총동원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아무리 효율적이고 강력한 리더십이 있다 하더라도 그 사회 구성원의 자발적 참여를 의미하는 민주적 역량이 살아 있지 않으면 산업화는 쉽지 않다.

사회구성원의 자발적인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체제가 바로 민주주의다. 자유와 평등, 인간의 창의성이 보장되지 않으면 사회 전체의 균형적인 발전은 가능하지 않다. 그러기 때문에 민주화는 산업화에 우선하고, 산업화는 사회구성원의 자유와 창의성을 기초로 탁월한 리더십이 수반될 때에 가능하다. 4.19혁명으로 확립되어간 민주적 역량이 산업화를 재래(再來)했던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4.19혁명은 한국의 민족주의를 부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민족 통일운동과 각종 국학운동에서 찾을 수 있다. 6.25를 통해 남북은 극단적인 대결상태로 들어갔고, 통일 논의 자체가 가능하지 않게 만들었다. 남측에서는 멸공․북진 통일을 말하고 북측에서는 공산혁명과 적화통일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4.19는 당시 거의 금기시되었던 평화통일론을 대담하게 내세우게 되었다.

종래 타도의 대상이었던 북을 대화의 대상으로 삼아 통일을 논의하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북을 포용하는 새로운 민족주의를 가능하게 했다. 이 새로운 사조는 민족주의 사학자 신채호나 박은식을 우리 앞에 세웠고, 민속 국악 풍물 등 전통문화를 새롭게 부흥시키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4.19는 민족문화를 가능하게 한 혁명적 사건이었다.

4.19혁명은 한국사상 최초로 민중의 밑으로부터의 혁명을 가능케 한 역사적 사건이다. 한국은 4.19혁명을 통해 민중의 역사 변혁적 역량을 자부하게 되었다. 그 뒤 군사독재의 유신정권과 파쇼적인 신군부세력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4.19’에서 그 가능성을 경험한 민주적 역량 때문이었다. 이것은 또한 미래에 어떤 반민주적 세력에 대해서도 이를 극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우리 역사에 각인시켜 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4.19’는 과거 속에만 존재하는 단순한 한 ‘사건’이 아니라 끊임없이 혁명적 역량을 재생시켜주는 에너지원이라고 할 수 있다.

취재부 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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